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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의 드라이빙은 조수석에 앉은 관람객을 멀미나게 한다 (Mullholand Drive, 2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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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치의 드라이빙은 조수석에 앉은 관람객을 멀미나게 한다 (Mullholand Drive, 2001)

Peartree1229 2025. 2. 19. 02:10

얼마 전 영화계의 거장 데이비드 린치 (David Lynch, 1946~2025)가 작고하였다. 그의 새로운 영화를 더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의 걸작 영화 중 하나인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lholland DR.>가 cgv에서 단독개봉했다는 사실은 그 아쉬움을 일부 달래주었다. 이전에도 그의 영화를 많이 감상한 기억이 있으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내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자괴감 뿐이었다. 

 

컬트적인 그의 영화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 꽤 많이 알려져있는, 나름대로의 유명세가 있는 영화이다. 뭐, 그 이유는 아마도 각종 매체가 (아마도 조회수를 위해 약간의 논란거리를 함께 제공하며) 모든 영화를 줄세우는 작업을 할 때 가장 최상단에 이것을 꼽기 때문이다. 심지어 BBC는 이 영화를 21세기 최고의 영화 1위로 선정했다더라. 소위 '영화 취미인' 들에게는, 이 타이틀은 굉장히 고혹적이다. 도대체 최고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과 더불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그 영화를 '극장'에서 감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굉장한 논리적 비약이라는 생각이 겹쳤다.

 

사전에 멀미약을 복용하다

얼마 전 재개봉에 맞춰 이 영화를 본 것은 이 걸작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시도였다. 고민이 많았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준비를 해야할까? 사전에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갈까? 아니면 아예 보지 말까? 아니면 시놉시스만..? 결국 귀한 기회 속에서 많은 걸 얻어가야 한다는 욕심에 못이겨, 각종 매체에서 시놉시스와 간단한 요약 줄거리와 영화 시나리오의 구조를 찾아보고야 말았다. 생각이 지나갈 수 있는 길과 그 옆의 길이 아닌 부지를 스스로 구분하고 닦은 셈이 되었다. 이러한 '이산화'는 영화의 모든 장치를 한 길로 안내하는 한낱 편협한 내비게이션일 뿐이었다. 음,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이해가 쏙쏙 되더라. 그렇게 혼란스러운 영화인가? 약 100분간 린치 감독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은 나는 사전에 복용한 멀미약 덕택에 멀미가 줄었다. 멀미를 하려고 탄 차에서 멀미를 하지 않았다면..? 행운인 것일까..?

 

평탄한 고속도로를 등속으로 달리며 드라이빙을 시작하다

사전 자료를 찾아보고 단 1초만에 위의 글처럼 생각이 뻗쳐버렸지만, 이미 닦아버린 길을 어떻게 다시 덮으랴. 남은 건 늦은 후회뿐이다. 영화 중반까지는 객관적으로  (역대 1위의 영화인 것 치고) 플롯이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관객을 끌어들이는 몰입도는 매우 높다. 그 뻔하고 단순한 플롯에서 흥미를 이끌어내는 영화의 재미있는 능력 또한 평가에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리타는 누구인가? 그를 노리는 표적은 누구인가? 더불어, 베티는 왜 저렇게 리타를 열심히 도와줄까? 몇 가지 해결되지 않은 맥거핀 속에서 그 미스터리들의 단서를 찾는데 집중할 뿐이다.

 

많은 영화들의 전개는 산을 타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산의 등산로에서는 내가 지금 어디를 오르는가,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보이는 정상을 향해 주어진 경로에 맞게 차근차근 올라간다. 중턱쯤 올라가면 서서히 주변 경관이 하나둘씩 보이며 나의 위치를 추리한다. 정상에서는 비로소, 산행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많은 영화 또한 그렇지 않은가?

 

전반부의 영화가 너무나 평탄한 고속도로를, 급정거 하나 없이 등속으로, 내가 차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조차 까먹을만큼 부드럽고 순서 지향적이다. 그럴수록, 그의 드라이빙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고속도로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IC(Interchange)로 나가지 않았다. 역시나, 어쩌면 생각했던것보다 더 과격하게, 도로 옆 가드레일을 갑자기 뚫고 자동차가 풀밭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이내 풀밭의 끝에는 또 다른 도로가 닦여있다. 그 도로는 원형 도로이다. 나가는 곳도, 들어오는 곳도 없다. 린치는 이탈리아 풍의 오페라 음악을 틀어주며 차를 과격하게 몇 바퀴 돌렸다. 심한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시작도, 출구도 없는 이 길은 왜 닦여있는가? 그러다, 그의 차는 곧 다시 풀밭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새로운 고속도로 맞은편에는 등속으로 달렸던 이전의 고속도로가 보인다. 다이앤이 베티이고, 카밀라가 리타라는 것을 인지하는데는 오랜 노력과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그들 인물의 성격과 실태를 파악하는 것도 간단하다. 새로운 고속도로에서도 린치는 등속 운동을 한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제서야 나는 한참동안 달려왔던 옛 고속도로의 경관을 구경한다. 리타가 왜 고속도로에서 위험에 쳐했을까? 그것은 다이앤이 그곳에서 카밀라를 빼앗겼기 때문이지. 카밀라 로즈가 그토록 캐스팅되었어야만 한 이유는? 평소 카밀라는 다이앤을 영화에 단역으로라도 꽂아주던 사람이었어. 베티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라도 본인이 주체가 되어 역으로 그녀를 영화에 넣어줘야만 한다는 강한 권위욕과 집착이 있었을 거야. 

 

복잡했다. 그러나 영화를 두 파트 (전반부, 후반부)로 나누고, 앞뒤의 플롯을 대조하며 앞쪽 플롯의 미스터리를 뒤쪽의 서사 관계로 해결하는 작업은 꽤나 재미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의한 그 전반부의 어떤 장면도, 후반부의 서사관계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영화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봐야 제맛이 날 것이다...?

 

전반부 후반부
베티는 이모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유명 감독인 아담 캐셔의 눈에 쉽게 들어버리고, 영화배우로써의 탄탄대로가 열렸다. 반면, 리타는 베티에게 매우 의존적이다. 다이안은 자신을 매번 영화에 꽂아주던 톱스타 카밀라에게 깊이 의존하는 상황이다.
베티는 이모가 거주하는 크고 좋은 저택에서 거주한다. 다이안의 거주지는 시에라 보니타인데, 그곳에 사는 다른 여자의 처지로 보아 삶의 빈곤성을 가진 이들의 집합소로 그려진다. 
리타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차 사고가 난 후 누군가에게 쫓겨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겨우 살아나왔다. 다이안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그려진 파티장의 입구를 보고 로맨틱한 프로포즈의 서막이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카밀라의 애정의 배신을 목격하기 위한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다이안에게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자동차, 주위 풍경은 파멸적인 감정을 선사한다. 더불어 아담 캐셔와 카밀라가 자동차 안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영화 제작자들은 냅킨과 에스프레소 등으로 트집잡으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후반부의 다이앤이 보는 헐리우드 관련 인물 및 제작자에 대한 감정이 전반부의 해당 장면에 투영되었다.
아담 캐셔는 파산 위기에 처하고, 부인도 잃었으며, 페인트도 뒤집어쓰는 멍청하고 웃긴 캐릭터로 등장한다. 카밀라가 사모하는, 자신으로부터 마음을 뺏기게 만든 원흉인 아담 캐셔를 증오하는 마음이 투영되었다. 전반부의 해당 장면을 통해 통쾌함과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코코는 깐깐하고 성격이 더러운 관리인이다. 파티 장면에서 아담 캐셔의 엄마로 등장한 코코는 역시 깐깐하게 다이앤을 쏘아붙인다.
전반부의 카밀라 로즈는 누군가의 압력을 받아 캐스팅된, 그다지 가치없고 쓰잘데기 없는 배우일 뿐이다. 후반부의 카밀라 로즈의 감독(아담 캐셔)과의 관계, 그로 인한 대성, 자신에 대한 마음을 뺏긴 상황 등에 대한 복합적인 질투심이 반영된 결과이다.
전반부의 '베티'가 공항에서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밝고 쾌활한 장면이 아닌가? 어쩌면 후반부의 비참한 현실로부터 도피한 꿈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최초의 장치일 것이다.
카우보이는 아담 캐셔에게 압력을 행사하며, Pretty girl을 깨우는 인물이다. 파티에서 유독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다이앤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일까?

 

전반부의 이미지들은 정말 '꿈' 같다. 현실의 기억들의 전개로 만들어진 음식을 잘게 찢고 분해하여 통 안에 마구 섞고, 그걸 자의에 의해 마구 뭉쳐서 반죽해놓은 느낌. 자의가 들어갔기에 반죽으로 만든 요리의 맛은 굉장히 타당하며, 속재료의 맛도 참하게 살아있다. 그렇지만 만들어진 최종 완성품은 찢기 전의 어떤 요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불규칙적이고 랜덤하지만, 매우 타당하고 논리적인 재조합.

 

그러나 그 재조합은 그의 드라이빙 스타일 치고는 너무 일관적이고 예상가능하다: 첫 번째 작품성의 고지에 다다른 것 같아 기분이 좋았지만, 영화의 치밀하고 정없는 일관성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나를 안심시킨다. 더 이상 멀미가 나지 않는다. 왜 이 차가 그토록 '멀미나는 차'로 유명했을까? 놓친 것인가? 뭔가 찝찝하기도 한데. 그쯤, 그의 차는 다시 풀밭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포장되지 않은 길로

치밀한 일관성으로 이 영화를 종결시키기에는 많은 것들이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첫째, 나의 자존심이다. 이건 한 번 내가 이렇게 보고서는 해석할 수 없는 영화일거야. 그런 생각. 둘째, 뭔가 모를 영화의 미장센과 장치들. 고속도로를 옮겨가는 과정에서 본 풀밭, 그리고 원형의 도로. 클럽 실렌시오, 그리고 파란색 상자와 열쇠. 경유지 속 그러한 물체들이 갖는 의미. 셋째, 영화 극후반부에 다다라 나타난 멀미의 절정. 한동안 린치의 차는 비포장된 풀밭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멀미와 함께, 이곳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실렌시오는 이태리어로, 침묵이라는 의미다. 이곳에서는 녹음된 오케스트라 음악과 녹음된 목소리, 거기에 맞춰 울음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등장한다. 배우는 쓰러지지만, 목소리는 지속된다. 소모품으로써 배우를 바라보는 리타의 관점이 투영된 것인가? 들리지만, 들려주지는 않는, 허구의 무언가, 우리만의 환각을 시사하는 곳으로 느껴진다. 리타가 이곳으로 베티를 데리고 간 것은, 듣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환각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구나. 그러면 '침묵'의 의미는? 무엇을 침묵하라는 것일까? 이곳이 환상세계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을 침묵하라는 것일까? 침묵을 요하는 대상은 누구지?

 

실렌시오에서 파란 상자가 발견되었다. 그것을 열고자 하는 베티와 리타이다. 설정상 그것이 매력적인 환상의 첫 번째 고속도로에서 참혹한 현실을 내포한 두 번째 고속도로로 향하는 길잡이로 활용되었다. 아, 원형 도로 한가운데 크게 써 있던 침묵의 표시는, 어쩌면 이곳을 지나는 운전자들에게 두 번째 고속도로로 나가는 길을 발견했더라도 조수석에 앉은 사람에게 침묵하라는 의미였던 것인가? 꿈에서 깨지 않기 위한 엄중하고 근엄한 다이앤의 무의식 중 강한 경고였던 것일까?

 

다시 한 번, 가장 멀미가 났던 곳으로

그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린치는 차를 그 원형 도로로 다시 한 번 몰고 왔다. 또 다시 몇 바퀴를 돈다. 아까보다는 짧게 들른 것 같지만, 경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번에는 무엇을 또, 침묵하라는 걸까? 침묵은, 달콤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그녀의 마지막 발악이자 최후통첩의 표시였다. 다이앤은 새로운 환상에 빠진 것일까?  어쩌면 그는, 죽음과 함께 새로운 생각의 도피처를 마련한 것일까? 

 

다이앤이 꿈에서 깨지 않도록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도피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을 고하며 다시한 번 고속도로를 찾아들어갈 것인가? 린치는 비로소 차문을 열고 내린다. 운전대를 잡은 것은 비로소 우리다.


멀미가 걷힌 후

린치의 드라이빙은 비범했다. 익숙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도로 표지판이 사라지고, 원형 교차로에 진입한 듯 방향 감각이 흐려진다. 이내 비포장도로로 빠져나가면서 풍경은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운전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런 영화다. 전반부는 매끄럽고 유려한 고속도로 같다. 배우를 꿈꾸는 베티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고, 우연히 만난 리타와 함께 그녀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이 과정은 마치 탐정소설처럼 전개되며, 관객은 비교적 선명한 서사 위에서 길을 따라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화는 도약한다. 인과 관계가 불분명해지고, 인물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러워한다. 관객은 이제 도로 위에 홀로 남겨진다.

 

이 영화는 단순히 '꿈과 현실'의 대립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러한 이분법은 오히려 영화가 안내하는 복잡한 미로를 단순화하는 함정이 된다. 영화는 직선적인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이미지와 정서의 충돌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클럽 실렌시오에서의 장면은 이 점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은 녹음된 것이다." 선언과 함께 음악은 흐르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다. 파란 상자가 열리는 순간, 관객은 마지막 남은 지지대마저 잃고 완전한 붕괴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린치의 도로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방황한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경험한 감각과 감정들은 단순한 해석을 초월한 채,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결국,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감각을 느꼈느냐는 점일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잊지못할 감명을 받았다. 첫 번째, '꿈'이라는 속성을 완벽하고 치밀하게 구현한 매체물을 접한 것에 경의를 표한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표와 같은 아주 일관적이고 논리적인 대조를 통해 매우 과중하게 표현하였는데, 그 과중함을 챙겨가는 과정에서 한 발짝 물러나 꿈을 복기하는 아침의 우리들의 형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비몽사몽한 상태,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그 감정을 (초집중 상태의) 의식으로 가득찬 상황에서 재차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둘째, '꿈'을 찌질한 도피처이자 부질없는 소원수리함으로 이용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신랄하고 잔인한 영화 속 처형에 감탄하였다. 다이앤의 달콤한 상상의 댓가는 상상 밖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상상 속에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바로 그 달콤함 속 번지는 비참함의 향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다시 볼 자신은 없는 영화이다. 왜 1위 영화인가, 그것을 더 알고 싶지도 않다. 나중에, 이 영화를 본 경험도 꿈에서 만들어지겠지.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들과 평소 나의 생각들이 재조합되어 나름의 새로운 일관된 플롯의 꿈을 만들어내는 것 까지가 이 영화 감상의 최종 마무리가 될 것이다. 나의 베티와 리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