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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노트
고유(固有) 본문
1년간 다섯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아직은 여행 초보자이기에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정복해나가는 한편, 우연찮은 계기로 일본의 '도쿄'를 두 번 다녀오게 되었다.
연구자는 여행에서도 연구를 갈망한다
그동안 같은 여행지를 두 번 다녀오는 것만은 최대한 기피하려 했었다. 얼마 전 변산반도를 약 7년만에 재방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전의 것들이 생생하게 다 기억나더라. 여기서 조개를 캤었는데, 이 회센터에서 회를 떠서 옆에 있는 리조트에서 먹었었지. 추억을 회상하고 그것을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꽤 신비로운 경험이다. 이전의 추억은 마치 '꿈'을 회상하는 것과 같아, 조각과 같은 기억의 파편들이 시간의 자석에 이끌려 순서대로 재배열된다. 한편으로는, 그 재배열이 끝난 직후 그곳에서 무언가 더 얻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예측가능의 범주 속에 존재한다.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시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양이 그리 크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 무언가를 선망하는 마음은 그와 반대로, 불확실성에 기반하여 만들어진다. 한 분야의 전문인을 사모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그의 분야에 대한 깊이는 단 몇 시간의 대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는 그에 대한 불확실성은 바로 그 선망을 이끌어낸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
비행기를 타는 순간, 사람들은 기대한다. 무엇을 기대하는가? 한국이 아닌 것을 기대한다. 전반적인 경향은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일수록 그 기대가 커져 더욱 '한국의 것'이 없기를 바라며, 보수적이고 안정을 꾀하는 사람들일수록 수만킬로미터 떨어진 해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것'의 공존을 바란다.
유수의 여행지들도 그러한 연속적인 수요에 발맞추어 '한국의 것'이 적절한 수준으로 다양하게 섞여있다. 경기도에 속해있는 도시라 여겨지고 불리우는 여행지들은 '한국의 것'을 그저 조금 많이 받아들여 그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타겟할 뿐이다. 다만 그러한 관광 개발 전략은 한국인을 제외한 다른 관광객들을 받기 어렵게 만든다. 그만큼 한국인이 돈이 된다는 것일터. 반면 몇몇 여행지는 '정말 이국적이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도 있다. (아마존, 남극이 물론 그렇다) 그 여행지들은 다른 어느 국가와도 겹치지 않는 이국적 풍경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것만, 단지 그것만 만족시키면 세계 모든 국가의 도전적인 여행자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
그러한 이국적 풍경은 역사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도, 건축도, 문화도, 시간 앞에서는 분리된 개별 주체마다 독립적으로 변화한다. 물론 '상사(analog)'의 개념처럼, 독자적으로 발전한 두 요소라 하더라도 유사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상사 기관도 뜯어보면 해부학적 구조가 전혀 다른 것 처럼, 유사성 속 차이점이 쉽게 발견된다. 이것은 그 요소를 배로 재미있게 이해하도록 한다.
같은 장소에 두 번을 찾아가다
도쿄에 다시 간 목적은 단지 바(BAR)를 가기 위함이다. 일전의 여행에서는 정보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좋은 바를 찾아가지 못하였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바에 가서 먹어야 겠다는 각오로, 이틀동안 바를 총 두 번 방문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위에는 바를 함께 가줄 수 있는, 액체의 맛을 이해하고 있는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 두 바 모두 긴자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바에서는 재패니즈 위스키와 그것들을 활용한 칵테일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커버 차지와 마신 술들을 합해보니 이틀만에 과외로 번 돈을 제법 까먹었다.
바의 첫 잔은 매번 진 토닉(Gin tonic)이다. 가장 값싸게 그 바의 기술을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더불어 입을 깔끔하게 개워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첫 번째 바의 진 토닉은 가히 한국의 것과 비교하였을 때 압권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쭉 지켜보았을 때는 정석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맛을 이끌어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제 재패니즈 위스키를 마셔본다. 피트 러버로써, 바로 강렬한 도수의 피트 위스키를 추천받았다. Akkeshi 2024 'shosho' season은 피트 향이 매우 강하지만 끝맛에 불쾌함이 없다. 그러나 절대 삼키기 쉬운 가벼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디감은 매우 충분하였다. 하나의 좋은 맛을 갖추었다면 포기해야 하는 맛도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결점의 맛을 완성시킬 수 있었을까? 역설적인 여러 테이스트의 공존에 흥미로워하며 이 위스키의 원산지와 구매처를 바텐더에게 물었다. 삿포로에 증류소가 있고, 지금은 도쿄역 인근이나 긴자의 구석진 바틀샵에서만 겨우 구할 수 있을거라더라. (이 바의 술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수작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내가 가본 바틀샵, 리쿼샵에서는 단 한군데도 이 술을 팔지 않았다!)
친구가 주문한 메뉴는 비교적 유명하고 대표적인 재패니스 위스키 여러개를 세트로 먹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 일본 특유의 정갈함과 깨끗함이 잘 느껴졌다. 삼킬 때 불쾌함이 없었고, 위스키의 기본기는 완벽했다. 요즈음의 일본 축구를 보는 것 같았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은 굉장히 아기자기한 패스, 착착 발에 붙는 공, 안정적인 밸런스를 바탕으로 템포가 빠른 점유율 축구를 한다. 모든 것은 운이 아닌, 기본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괄목할만한 유스 시스템과 국대 선발 정책을 통해 이 기조를 약 10여년간 만들어오고, 또 유지한다. 위스키에서도 그 기조가 느껴진다.
cf) Shosho is the time of year when the heat begins to abate. The insect songs at dawn and dusk signal the end of summer. Shosho (Manageable Heat) is the season that begins around August 23 in the modern calendar. The term “shosho” literally means “subduing heat,” which is an apt description. (Google)
재패니스 위스키는 탄탄한 기본기로부터 야기된 깔끔함과 적은 불쾌감이 매력이나, 각 위스키 별로 특별한 고유의 맛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바틀별로 뭔가 미묘하게 다른데, 뭐가 다른지 설명하라고 하면 말을 못할 것이다. 블라인드 테스트도 전혀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이 지역의 위스키만이 갖는 특성이니 받아들여야 할 부분인 것. 더욱이 Akkeshi는 특히 그 기본기만으로 내가 먹어본 모든 다른 피트 위스키를 압도해버렸다!
마지막 날, 나의 매우 강력한 주장으로 친구들을 바로 다시 이끌었다. Akkeshi를 바랬는데, 있었다! 연도별로, 올드 바틀까지. 우선 재패니즈 위스키로 만든 칵테일을 먹고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기본기를 뚫는 맛의 특별함을 재패니즈 위스키가 구현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품고, Akkeshi edition 중 가장 heavily-peated한 바틀을 추천받고자 했다. 이번에는 Akkeshi 2021 'Ritto' season이 꺼내졌다. Ritto는 겨울 그 어딘가의 계절이다. 온도가 낮은 겨울에는 피트의 주성분인 페놀의 증발률이 낮아지는게 피트가 강해지는 주 요인이라고, 바텐더는 친절히 설명해준다. 삿포로의 겨울이라면, 더욱이 얼마나 추울 것인가. 삿포로와 겨울이 더해진 순간, 이 바틀은 일본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강한 피트 위스키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셈이었다. 시향하는 순간, 아주 강렬한 피트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맛은, 또 깔끔했다! 한결같고 일관적인 재패니즈 위스키에 감탄하며 다시 한 번 천천히 향을 충분히 맡으며 시음하였고, 피트의 향과 깔끔한 맛이 더해져 깔끔한 피트라는 역설적인 조합을 경험하였다.
재패니즈 위스키라는 것이 왜 독립적인 분류로 일컫어지는지 느낄 수 있는 두 번의 경험이었다. 그들은 독립성을 인정받기 위한 그들만의 일관적인 특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위스키'에서 일본의 고유(固有)는 살아있었다.
다음 번에도 도쿄를 또, 방문할 것이다. 그때는 위스키가 아닌, 다른 것에서 일본의 고유(固有)를 찾아보고자 한다. 거리든, 식습관이든, 하루 일과든, 축구 경기든, 뭐든 좋다. 위스키의 고유와 닮아있는 또 다른 고유를 전혀 닮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서 찾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은 곧, 나를 일관성에 감탄하게 하며 성급한 일반화를 이뤄내도록 독촉할 것이다. '일'의 고유(固有)'에 대한 통일된 주제에 대한 굉장히 러프한 소견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않을까.